현 진행자 정준희 교수와 최장 진행자 손석희 사장의 만남
백분토론이 천회를 맞았으니, 대략 십만분의 토론이 있었던 셈이다. 우리나라는 토론문화가 상대적으로 덜 활성화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 시사 토론 프로그램이 유지됐다는 거 자체가 의미 있다. 엊그제는 백분토론 1001번째 방송이자 1000회 특집의 2부로, 50분짜리 짧은 다큐멘터리가 방송됐다.
100분토론의 현재 진행자인 정준희 교수가 100분토론의 최장진행자였던 손석희 사장과 일본에서 만나 '토론'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100분토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내용이다. 손석희 사장은 2002년부터 2009년까지 백분토론의 진행자로 활동했는데, 8년 동안 무려 343번의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하다 보면 가끔 양측 패널의 논의가 격렬해져서 진행자가 곤란하거나 기 빨릴 거 같은 순간들이 보인다. 그리고 아무리 진행자라지만 토론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매끄러운 진행이 가능할 것이다. 쉽지 않을 텐데, 이걸 이렇게 오래 잘 해낸 데에는 '토론' 혹은 '진행'에 대한 어떤 철학이나 자세가 있었기 때문일 터. 백분토론 1000회 특집이 손석희 사장을 만나러 간 건 좋은 선택 같다.
참고로, 1999년 10월에 시작한 100분토론은 지금까지 총 15명의 진행자가 진행을 했다. 손석희는 3대 진행자이고, 정준희가 15대 진행자이다. 이 둘을 제외한 다른 열세 명의 진행자들은 대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진행을 했다(2대 진행자는 유시민 작가다). 손석희는 8년 진행자를 맡았고, 정준희는 4년째 진행을 맡고 있다.
개인적으로 특별하지 않았는데도, 다시 보니 그리운 얼굴들
특집이고 다큐멘터리라지만, 그리 거창하고 무거운 영상은 아니다. 1000회 동안의 100분토론을 돌아보는 것이 주된 흐름이라, 옛 영상들을 자주 보여준다. 사실 100분토론의 애청자가 아니었음에도 뭔가 향수 같은 게 느껴지더라.
젊은 시절의 손석희, 홍준표, 유시민을 보는 건,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하는 아련함 정도의 감정이다. 그런데 이제는 볼 수 없는, 과거 100분토론에 나와서 인상적인 토론을 펼쳤던, 신해철, 노무현, 노회찬의 영상을 보니 뭔가 괜히 먹먹한 기분까지 들었다. 사실 이 중 누구도 내가 특별하게 좋아하거나 지지했던 적이 없는데도 이런 마음이라 이상하기도 했다. 고인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하고, 또 이들의 죽음이 자연사는 아니기에 더 복잡한 마음이었던 거 같다. 이들의 삶이나 죽음이나 견해에 대해서 논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과거 백분토론에 나와서 토론했던 걸 보니, 다 차분하면서도 위트있게 말을 참 잘하더라. 백분토론으로서는 아까운 인재들을 잃은 셈일 거다. 특히 신해철의 경우, 정치인이나 언론인도 아니고 대중 예술인으로서 백분토론에 나오는 게 녹록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대마초, 간통죄, 사랑의 매 등의 주제의 토론에 나와서 인상적인 토론을 펼쳤더라. 400회 특집에도 나와서 신랄한 논점과 함께 웃음을 주기도 했고.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고 그러는데 저는 이미 거의 영생의 길에 도달해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100분토론 400회 특집에 나온 신해철의 말 중)
그래서, 토론 계속해야 합니까?
영상 후반부는 우리가 토론을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손석희 사장은 이런 말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토론 뭐야? 또 결론이 없잖아'라고 하는데, 결론은 원래 없는 것이라고. 다만 백분토론을 보면서 지금 상황과 지금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주면 된다고.
사실 얼마 전에 백분토론에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0.78로 최저인 부분과 관련해 저출산을 주제로 토론한 적이 있다. 이걸 보고 나도 '결론이 없잖아' 이런 생각을 하긴 했다. 결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더 깊이 있는 토론이었으면 좋았을 거 같다는 아쉬움도 컸다. 그러나 지금 저출산이 이렇게 큰 문제이고, 그것에 대해 어떤 대책과 생각들이 있는 상태이며, 또 이게 지금 얼마나 답답하게 정체되어서 해소책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까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백분토론이 한 셈이다.
손석희 사장은 또 이런 말도 한다.
판단은 누가 하느냐? 아직 판단 내리지 못한 사람들이 합니다.
정답일세... 백분토론 343회, JTBC 신년토론 10회를 진행한 손석희 사장은 지금까지 완벽하다고 생각한 토론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뭔가 토론이라는 게 완벽을 위해 답을 놓고 그리로 간다기보다, 서로 부딪치고 세우고 깎여가며 진행되는 것 같다.
대통령 선거 무렵은 대통령 후보 토론회를 본다. 우리나라 대선 때도 봤지만, 벌써 꽤 오래전 힐러리와 트럼프가 맞붙은 미국 대선 토론도 유튜브에서 찾아본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왜 힐러리처럼 뭔가 카리스마 있고, 똑 부러지게 토론 잘하는 대선 후보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은 트럼프가 되어버렸지만...)
그런데 대통령 후보까지 갈 것도 없이, 초중고등학교, 대학교만 봐도 우리나라는 서구권 국가들에 비해 토론이 부족한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장점을 또 갖고는 있겠지만, 토론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건설적이고 화합하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게다가 지금처럼 AI 알고리즘이 내가 듣고 싶은 정보만 쏙쏙 뽑아다가 '답정너' 식으로 피드를 먹여주는 세상에서는 더욱 간절히 필요하다.
그래서, 토론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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