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자서전 기반 영화 <힐빌리의 노래> 소개
책 '힐빌리의 노래'는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젊은 사업가 J.D. 밴스가 쓴 인생 회고록이고, 한국에 번역되어 들어온 게 2017년이다. 신문에선가 책 소개를 보고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읽진 않았다. 그리고 2020년에 이 책이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 되었다.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책보다 별로인 경우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넷플릭스에 있길래 영화를 보기로 했다.
러닝타임은 1시간 57분, IMDB 평점은 10점 만점에 6.7로 그다지 높지 않다. 책은 명성이 꽤 자자한데, 영화는 역시 별로인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검색을 해서 책의 내용도 조금 찾아보니 이 괴리가 이해가 되더라. '힐빌리의 노래'는 책과 영화가 아예 포커스를 다르게 둔 것 같다.
[영화 줄거리 및 감상] 가장 밉고도 가장 애틋한 관계, 가족
영화는 주인공 J.D.가 10살 안팎의 소년 시절을 그리며 시작한다. 공간 배경은 캔터키주 잭슨. 미국의 어느 시골인 듯하다. 이때 가족관계가 나오는데, 할머니, 엄마, 누나가 J.D.의 가까운 가족이다. 백인이지만 가난한 편이다. 그리고 초반부에 바로 14년 후로 넘어가서 알바를 하는 청년 J.D.가 나온다. 알바는 식당에서 하는 듯 하지만, 오하이오 주립대 졸업 후 예일대 로스쿨에 재학 중인 인재로 성장했다. 여자친구는 같은 로스쿨에 다니는 인도인 우샤.
J.D.는 로펌에서 여름 인턴을 구해야만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로펌 관계자들이 모인 저녁 파티에 참석하지만, 고급 식사에 익숙지 않은 J.D.는 와인의 종류가 뭐 이리 많고, 식탁 위에 웬 포크와 스푼이 이렇게 많은지 위축되고 만다. 거기다가 누나로부터 전화가 와서 엄마가 입원했다는 소식까지 듣는다. 엄마가 병원에 간 이유는 약물 중독 때문이다. 이번에는 헤로인을 했다는 걸 보니, 문제가 많은 엄마다.
영화는 로스쿨에 다니는 J.D.와 어린 J.D.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어린 시절, J.D.의 엄마는 자식들에게 성실하지 못했다. J.D. 엄마는 학창시절에는 400명 중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학업을 지속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만나는 남자들은 다 별로였고, 나중에 밝혀지는데 어린 시절에 부모의 격한 싸움을 보고 정신적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나름 똑똑한 소녀였지만 인생이 잘 안 풀렸다고 볼 수 있다. 간호사가 되어 병원에서 일을 하는데, 여기서 약물 중독이 되어 간호사 자격증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잘 살면서 애들도 잘 키워보고 싶지만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엄마는 때때로 분노조절장애 같은 증상도 보이고, J.D.에게 손찌검을 해서 경찰이 오기까지 했다.
J.D.도 점점 불량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성적도 뚝뚝 떨어지고, 막 나가는 학창시절을 보낸다. 수업 준비물인 82달러짜리 계산기를 살 돈이 없으니, 공부를 열심히 할 맛도 안 나는 게 이해된다. 이를 보다 못한 할머니가 J.D.를 데려와서 직접 양육하기로 한다. J.D.도 엄마보다는 할머니를 택한다. 그런데 할머니도 가난하긴 마찬가지다. 정부 지원 음식으로 끼니를 연명하는 중에도 손주에게 계산기를 사주는 할머니. 다정한 스타일은 전혀 아니고 엄격한 편인데, 그래도 애를 제대로 키울 줄은 아는 할머니다.
할머니 밑에서 정신차리고 공부한 J.D.는 대학에 가고 해군에도 들어갔다가 예일대 로스쿨까지 잘 간다. (할머니는 몇 해 전쯤 돌아가신 상황이다.) 근데 섬머 인턴을 위한 저녁 파티에서 엄마의 입원 소식을 들은 것이다. 10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찾아가 만난 엄마는 만신창이인 상태다. 어렵사리 약물 중독 치료를 도울 시설에 자리를 마련했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카드를 서너 개 나눠가며 J.D.가 2주일 비용을 결제하는 걸 본 엄마는 시설에 안 들어가겠다고 배를 째버린다. J.D.는 다음날 인턴 인터뷰를 위해 얼른 가야 하는데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다. 누나에게 상의하니, 일단 모텔에 모셔두면 본인이 퇴근 후 데리러 가겠다고 한다. 모텔에 방을 잡고, J.D.가 잠시 음식을 사러 간 사이, 이 엄마는 또 약물에 손을 대려하고 이걸 본 J.D.가 가까스로 엄마를 말린다. 깊은 한숨이 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누나가 와서 J.D.와 교대해 엄마를 돌보고, J.D.는 인터뷰를 위해 밤길을 내내 운전해서 돌아간다. 몸도 마음도 무척 피곤하고, 인터뷰를 앞두고 있기에 긴장도 높아졌겠지만, 그를 전적으로 지원하고 사랑하는 여자친구 우샤와 전화통화를 하며 J.D.는 그 길을 잘 간다. 인터뷰 자리에도 잘 도착해서, 침착하게 인터뷰를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나래이션이 이 영화의 핵심을 잘 요약한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두 번의 기회가 필요했다.
처음엔 할머니께서 구해주셨다.
두번째로 날 구한 건 할머니의 가르침이다.
우리의 시작이 우리를 정의하더라도 매일의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완벽하진 않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들에겐 없던 기회를 내게 주었다.
어떤 미래가 날 기다리든 그것은 가족 모두의 유산이다.
[영화와 책의 차이] 가족에 집중 vs. 사회 문제에 집중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당연히 이게 가족을 그리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도 엄마도 누나도 J.D.도 나름의 상황 속에서 분투하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부대끼며 살아간다. 그 와중에서 남이라면 혀를 차고 돌아설 상황에서도 가족이기에 끌어안고 책임지고 함께 간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무위키에서 힐빌리의 노래 문서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놀란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 정치계의 이단아인 도널드 트럼프가 왜 저렇게 돌풍을 일으켰으며 끝끝내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미국에서도 수많은 논란과 함께 이를 분석하는 것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은 힐빌리의 노래를 통해 트럼프가 기존의 주류 공화당 정치인들을 전부 압도적으로 깨부수고 이후 힐러리를 이기고 미국 대통령이 되게 하는데 가장 막강한 원동력이 된 미국 저소득층 백인 노동자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아니, 힐빌리의 노래를 보고 트럼프의 인기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처음에는 내가 문서를 잘못 검색했나 의아하기까지 했지만, 읽다보니 이해가 된다. 영화는 J.D.의 가족이 가난한 걸 그저 어렵게 사는 모습으로만 보여줬다. 그런데 책에는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고 한다. 자기는 열심히 알바를 해도 스테이크 한 번 사 먹을 형편이 안 되는데, 이웃집 마약 중독자는 정부 실업수당으로 놀기만 하면서 2주마다 스테이크를 먹더란다. 앞집 사는 흑인 여자도 놀고먹으면서 정부가 주는 푸드 스탬프로 탄산음료 받은 걸, J.D.네 할머니에게 돈 받고 팔려고 했단다. 정리하면, 정부 복지제도가 소위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혜택을 제공하면서, 정작 열심히 일하는 백인 저소득층 노동자에게는 박탈감만을 준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다지 집중해서 보여주지 않은 부분이다.
트럼프의 인기에 저런 배경이 있다는 건 대강 알고 있었지만,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젊은 사업가가 자기 경험으로 생생히 그린 책이니 꽤 실감과 납득이 크게 될 거 같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사회 문제가 아닌 가족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한 것일 텐데, 책을 인상적으로 본 사람들에게는 몹시 실망스러운 각색으로 보였겠다는 점도 이해가 된다.
저자 J.D. 밴스, 정치인이 되다
이건 책과 영화의 뒷 얘기인데, 저자인 J.D. 밴스는 2022년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고 한다. 물론 공화당 소속이다. 원래는 트럼프의 이민정책, 사회정책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는데, 선거에 도전하면서 변심하여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고도 한다. J.D. 밴스의 정치적 선택을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실망한 사람도 있다는데, 어쨌든 38살 나이에 상원의원이 되었으니, 본인으로서는 정치적으로 성공한 셈이겠다.
참, 책과 영화에 나오는 여자친구 우샤는 현재 그의 부인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도날드 트럼프가 좋은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J.D. 밴스가 열렬한 트럼프로 변심했다는 건 썩 기껍지 않은 소식이다. 그러나 내가 미국 저소득층 백인이 겪은 박탈감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책은 몰라도 영화만으로는 저자의 정치 사회적 견해를 읽을 수도 없었기에 별 생각은 안 들었다. 다만, 젊고 똑똑하고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후 정치인이 된 사람인데, 사익보다는 공익을 위해 정치를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아까 백분토론 1000회 특집 3부 포스팅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젊은 정치인인 천하람 변호사와 이탄희 의원에 대해 바라는 마음과 비슷하다. 물론 우리나라 아니고 미국이니, 관심은 덜하지만서도.
아무튼, 영화 <힐빌리의 노래>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청소년이 보면 좋을 거 같은데 얄궂게도 19세 이상 관람가다. 아마 마약 중독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 듯하다. 나중에 기회되면 책도 한 번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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