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 총평 및 결말에 대한 견해
'오징어게임'은 내게 꽤나 재밌지만 아주 새롭지는 않은 콘텐츠였다. 예전에 아주 흥미 있게 읽었던 만화책 '도박묵시록 카이지'나 '라이어게임' 등이 오징어게임의 원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만화책과 드라마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개인적으로 더 재밌는 걸 고르라면 오징어게임보다는 카이지나 라이어게임이다. 오징어게임이 머리보단 몸을 쓰는 게임이 많았다면, 카이지와 라이어게임은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게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에서 엄청난 기록을 세워가며 K-콘텐츠의 위상을 드높인 오징어게임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긴 하다.
시즌3가 마지막 시즌이라길래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 궁금했는데, 다 보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현실적이고 나름 매듭지어진 괜찮은 끝을 보여준 거 같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현실 속에서 그 무엇 하나 변하지 않고 똑같이 돌아가는 세태가 굉장히 씁쓸하긴 하다. 현실을 잘 반영했으나 새로운 대안, 작은 희망, 깊은 여운 같은 것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80점 정도의 결말이랄까.
같은 상황, 다른 선택: 이정재 vs. 이병헌
매 게임과 각 선택의 순간들마다 생각해볼 점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하나만 톺아보려 한다.
최후의 8인, 아기를 포함하면 최후의 9인은 주최 측에서 마련한 만찬을 즐긴다. 마지막 게임은 참가자들의 결정에 따라 최소 3인만 탈락하고 끝날 수 있다는 힌트를 듣자, 이정재와 아기, 그리고 민수(약쟁이)를 제외한 여섯 명은 의기투합을 한다. 여기서 물론 임시완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 예상은 했다. 암튼 게임도 다 이긴 것 같고 오랜만에 고기에 술을 먹어 기분 좋은 아저씨 5인방은 쿨쿨 잠에 빠진다. 그리고 이때, 이병헌이 이정재를 불러서 칼을 쥐어준다. 다음 게임에서 다른 사람들이 너와 아기를 타깃으로 삼을 거라고, 그러니 이 칼을 들고 가서 지금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저들을 다 찔러 죽이면 너와 아기는 최후의 생존자로 살 수 있다고.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다. 이정재도 잠들어 있는 100번 아저씨의 목에 칼을 겨누고 고민한다. 그러나 결국 이정재는 그 밤에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반면 이병헌이 옛날에 참가자로 오징어게임을 했을 때, 같은 상황을 겪언던 장면이 보여지는데, 이병헌은 그때 그 칼로 남은 사람들을 다 죽였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가 되어 지금 게임 운영자까지 하고 있다.
이병헌의 선택은 나쁘고 이정재의 선택은 옳은가?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정재가 만약 그때 다른 사람들을 다 죽였다면, 이정재와 아기가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죽이지 않고 마지막 게임을 했기 때문에 이정재 마저도 죽고 아기만 살았다. 즉, 칼을 썼으면 7명이 죽었을 텐데, 칼을 안 써서 8명이 죽은 것이다. 만약 자기가 살아남는 게 죄책감이 들었다면, 자기가 아닌 아기와 다른 한 명만 살릴 수도 있긴 했다. 물론 어떤 게임인지도 모르고,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살리는 걸 임의로 결정하기 어려우니 이렇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정재의 선택은 죽음을 하나 더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바꿔놓지 못했다. 만약 주최측이 아기를 그냥 죽이고 456억을 꿀꺽한다고 해도 아무도 의의를 제기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이정재의 선택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실패한 정의가 의미를 가지려면...
시즌1에서는 (특히 초반에) 엄청 찌질한 캐릭터였지만, 오징어게임 우승 후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어쩌다 보니 또다시 이 게임에 참여한 이정재는 꽤나 의로운 캐릭터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다소 어색해 보일 정도로 너무나 비장하게 '얼음~~~!!'을 외치고, 게임 지속 여부를 두고 두 파로 나뉘어 갈등이 일어나려 하자, 우리 적은 서로가 아니라 주최 측이라며 반란을 시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란은 무참히 진압되었고, 아까 그 아저씨 5인방을 비롯한 빌런들은 이정재에게 사실 우리 편이었느냐고 조롱을 한다. 결과만 보면 맞는 소리다. 게임을 중단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죽어버렸으니 투표로 게임을 중단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경쟁자도 많이 줄었다.
반란 실패 후 넋 나가 있는 이정재를 깨운 건, 양동근의 엄마와 조유리의 아기다. 드라마답게 이정재는 끝까지 아기를 지킨다. 자기 목숨을 버려서까지. 그러나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미국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제2의 공유가 되어 딱지치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정재는 첫 게임 우승 후 그냥 오징어게임을 잊고 살았다면, 개인의 행복 측면에서 가장 나았을 것이다. (그런 살육의 현장을 쉽게 잊기는 힘들겠지만) 만약 이정재가 막대한 돈을 기반으로 이런 비인간적 게임을 주최하는 인간들을 잡아서 게임을 없애고 싶었다면, 처음 시도했듯 게임 밖에서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게임 안에 들어가서 게임판을 뒤엎는 것은 게임의 정점(우승자가 아닌, 주최측이나 VIP, 즉 이병헌이나 가면 쓴 외국인들)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정재는 정말 아무 의미 없이 개죽음을 당한 것인가? 사실 이런 류의 드라마를 이렇게까지 확장해서 생각하는 건 과몰입인 거 같지만 그래도 생각해보자. 이정재의 죽음, 즉 실패한 정의는 아직 무의미하지도 유의미하지도 않다. 어떤 미래가 펼쳐지는지에 따라 의미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해 보자. 많은 의로운 사람들이 대한 독립을 외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런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의 정신이 이어졌고, 마침내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일본의 패전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서도.) 만약 독립이 안 되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계속 남아 결국 그냥 일본의 일부가 됐으면 어땠을까.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독립운동가들은 정말 과거 속에 묻혀 사라진, 의미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이정재의 죽음도 비슷할 수 있다. 제2, 제3의 이정재 혹은 위하준이 나타나서, 결국 주최 측과 VIP들을 처벌할 수 있다면 그들의 죽음과 노력은 빛을 발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제2, 제3의 이정재 혹은 위하준은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타국에 의한 주권 침탈이나 독재 정치 같은 경우, 나와 내 사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쁜' 세력과 싸우는 것이기에 죽도록 저항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오징어게임의 경우, 극단적 형태의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의 일면인데 이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는 단순히 '나쁘다'라고 하기가 쉽지 않다. 자발적으로 독재 정권 하의 시민으로 들어가는 이는 없지만, 오징어게임은 시즌3의 투표에서 볼 수 있듯 상금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드라마처럼 목숨을 쉽게 앗아가는 극단적 형태는 현실에서 드물지만(없지는 않다고 본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추종하며 살고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적다.
돈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보편화되면, 제2, 제3의 이정재와 위하준은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이정재들의 죽음은 언젠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런 사회가 오길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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