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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

『아무튼, 달리기』, 사람은 뛰면서 어떻게 변하나

by 달리뷰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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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로 '달리기'에 관심 + 믿보책 '아무튼' 시리즈 = 아무튼 달리기

어제 포스팅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덕에 달리기에 관심이 생겼다. 관심이 생겼으면 일단 운동화 신고 나가 달려보면 될 일인데, 집순이 책순이 나는 달리기 책을 한 권 집어들었다. 전에 읽었던 『아무튼 식물』, 『아무튼 비건』과 같은 시리즈인 『아무튼 달리기』!

 

하루키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울트라 마라톤도 뛰어본 넘사벽의 느낌이라면, 이 책의 저자는 달려본 경험이 별로 없는 나와 같은 일반인의 입장에서 글을 시작한다. 동시대, 비슷한 나이(아마도?), 서울에 살고 있는 작가이니 하루키보다는 훨씬 가까운 느낌.

달리뷰가 리뷰한 '아무튼, 달리기' 표지
김상민 지음, 위고 출판, 2020.9.25 초판 발행, 『아무튼, 달리기』 (사진출처: 달리뷰)

 

야심한 밤 산책로에 선 남자, 수미상관이지만 달라져 있다!

157쪽 분량의 책이지만 판형이 작고 챕터 하나하나의 길이가 짧아서 금방 읽힌다. 그래서 펼친 자리에서 마지막 장을 덮었다. 피식피식 웃음 포인트도 있고(작가가 소심한 개그 욕심이 있는 듯), 예상 외의 울컥 포인트도 있어서 약 두시간 여의 주말 독서가 꽤나 즐거웠다. 

 

이 책 가장 첫 챕터 '출발선'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적 드문 야심한 밤, 산책로에 한 남자가 서 있다. 목 늘어난 티셔츠, 잘 때와 운동할 때 구분 없이 입는 것으로 추정되는 추리닝 바지, 거기에 어설프게 허우적 거리는 스트레칭 자세까지(p.9)'.

 

그리고 이 책의 가장 마지막 챕터 '다시 출발선'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적 드문 야심한 밤, 산책로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잔뜩 어색하던 동작은 제법 능숙해지고, 목 늘어난 티셔츠와 정체 모를 추리닝 바지는 꽤 그럴듯한 러닝 복장으로 바뀌어 있다.(p.155)'

 

이처럼 같은 듯 다른 책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약 5년의 러닝 경험이 녹아져 있다. 그동안 작가는 혼자서 뛰다가 러닝크루에 들어가서도 뛰어보고, 10km를 뛰다가 하프마라톤, 풀마라톤까지도 도전하고, 런태기를 겪고 또 극복하며 어엿한 러너가 되었다. 가볍고 재밌는, 한편으로는 특별할 건 딱히 없는 책이지만, 친구의 내밀한 성장기를 한 편 본 듯한 뜨끈한 뭉클함도 느껴진다. 

 

만약 러닝을 막 시작하거나 이미 즐기고 있는 이라면 더욱 순식간에 읽힐 것 같다. 당장 '나도 달리기를 시작하겠어!'라는 생각이 든 건 아니지만, 난 어떤 걸 이렇게 애정과 성실로 누리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이게 '아무튼' 시리즈의 포인트 같다. 

 

뭉클했던 포인트 셋: '머니볼' 장면, 실신한 첫 마라톤, 오사카 마라톤의 '믿음'

이 책에서 감동을 느낄 거라 예상하진 못했는데, 코끝이 찡하고 심지어는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장면이 몇 개 있었다. 이럴 것까지는 없는 내용 아닌가 싶으면서도, 코를 훌쩍 풀었다. 그게 뭐였는지 세 개 포인트 정리. 

 

1. '그날'

 

러너들에게는 평소 자기 실력보다 페이스가 확 좋아지는 '그날'이 간혹 온다고 한다. 작가에게 '그날'은 아주 예상하지 못한, 컨디션이 최악이라 완주를 걱정해야 했던 어느 하프마라톤에서였다. 달리기 전에는 불운이 겹쳤다 생각했지만, 출발선에 서는 순간부터는 여러 우연과 행운이 작용해 '그날'이 오고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작가는 이 기묘한 하루를 영화 '머니볼'의 한 장면으로 설명한다. 

 

어느 타자, 힘은 좋지만 발이 느려 2루타성 타구를 쳐도 1루까지 밖에 못간다. 한번은 이 타자가 자기 답지 않게 타구를 친 후 1루를 밟고 2루를 향해 달린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 가 넘어져 1루로 기어 들어온다. 폭소하던 관중들은 문득 그에게 환호를 보낸다. 어리둥절한 타자, 알고보니 그는 장외홈런을 쳤다. 

 

머니볼을 봤음에도 저 장면이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내가 야구를 꽤 좋아했던 편이라 그런지, 아니면 저자의 하프마라톤 에피소드와 겹쳐져서 그런지, 애잔한 엄마 미소가 떠오르며 뭉클했다. 

 

2. '처음이란 이름의 슬픔'

 

저자는 생애 첫 마라톤을 '파리 마라톤'으로 정했다. 풀코스를 뛴 경험 없이 다소 무모한 자신감으로 도전! 출발선상에 서기까지와 초반부 달리기까지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별 탈은 없었다. 문제는 후반부, 그리고 끝 이후다. 

 

38km가 넘어가면 모두가 한계점에 도달한다. 

내 몸 하나 가누기 어려워 어느 것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때 감정의 속살이 그대로 노출된다. 

수많은 마라토너들이 사소한 감정의 동요에도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이유다. 

일면식 없는 누군가의 응원에, 함께 훈련했던 동료들 생각에, 아니면 그냥 너무 힘들어서. 

얼굴은 땀으로 위장한 눈물로 범벅이 된다. 

나 역시 끝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때 내 눈물의 주요 성분은 설움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왜 이런 고통의 시간들을 자초했는지.

스스로를 향한 미움과 한탄과 연민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래도 끝은 내야 했다.

들썩거리는 어깨와 함께 마지막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p.130~131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누군가 우는 걸 보면 거울작용처럼 나도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이번에도 조금 그랬다. 그래도 작가는 겨우겨우 완주를 했는데,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앉았다 일어서는 도중 작가는 실신하고 만다.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의료부스에서 눈을 떴고, 간신히 호텔로 돌아가 만신창이의 몸으로 13시간을 내리 잔다. 내 지인이었다면 하고 생각하니 아찔한 마음과 걱정스런 마음이 요동하더군. 별일 없어 다행이오.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
마라톤, 달리고 달리고 달리는 러너들 (사진출처: pixabay)

 

3. '오사카 마라톤이 남긴 이야기'

저자가 참여한 오사카 마라톤은 기록보다 참여에 의의를 둔 참가자가 많은 것 같다. 세일러문 풀착장 러너, 정장에 구두 신은 러너, 기모노 입은 러너도 있었다 하니 말 다했지. 그런데 그중 한 무리가 안전모와 방독면으로 무장한 채 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옷에는 노란 우산 그림과 'Stand with HONG KONG'이란 글자가 박혀 있었다고. 또 결승점이 다가오는 지점에서 어떤 청년은 그와 똑 닮은 얼굴의 영정사진을 들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끝까지 달리고 있었다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달리기에 기부나 어떤 지지의 의미를 담아 행사를 개최하는 경우(혹은 혼자 뛰는 경우)를 본 거 같다. 사실 꼭 달리기여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미를 담은 달리기'를 보니 또 괜시리 짠해지더라. 

 

또 읽을 테다, 아무튼 시리즈! 

어쩌다 보니 세 번째로 읽은 아무튼 시리즈 책. 이전 두 권도 좋았고, 이번에도 재밌었다. 하루키의 달리기 에세이를 읽고 읽어서 더 재밌는 면도 있었다. 이 책에서도 하루키가 잠깐이나마 언급되기도 하고(달리기가 아닌 다른 일로지만).

 

얼마 전 이사하며 책이 너무 많은 것에 데여서, 도서관을 자주 이용 중인데 아무튼 시리즈가 이렇게 나란히 꽂혀 있더군.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에세이, 아무튼 시리즈
송파도서관에 꽂혀있는 아무튼 시리즈 (사진출처: 달리뷰)

 

비건이랑 식물도 다시 읽어보고 싶고, 발레랑 연필은 조만간 읽어볼 거고, 하루키랑 산이랑 바이크도 궁금하긴 하다. 누군가의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들여다 보는 건 아늑하지만 단단한 어떤 긍정의 힘을 전달받는 듯. 사서 읽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은 빌려서라도 읽어볼 예정!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아무튼'은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출판사가 함께 펴냅니다.

(아무튼 시리즈 뒤에 실린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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