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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

무슨 생각하며 뛰나: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by 달리뷰 2023.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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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에도 진심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는 1949년에 태어났다. 2023년 현재 70대 중반의 노인이다. 나이 서른 즈음 소설가로 데뷔해서 꾸준히 많은 소설을 써냈다. 다음달에 일본에서 신작소설 하나를 또 발표한다고 하니, 다작의 작가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키워드는 달리기다(음악, 야구도 있긴 하지만). 34살에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이후, 마라톤은 수십 번을 더 뛰었고, 46살에는 무려 100km 울트라 마라톤까지 뛴 사람이니 그럴만하다. 전성기 때의 마라톤 기록이 3시간 30분 정도라고 하던데, 나야 잘 모르지만서도, 아마추어로서는 몹시 훌륭한 기록이라더라.

 

이런 하루키가 쓴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예전에 한 번 읽고 요즘 다시 읽었는데, 역시나 재밌다. 2005년~2006년에 집필했다 하니, 이 책은 하루키가 50대 후반에 쓴 셈이다. 소설가는, 그것도 다작하는 이야기꾼 소설가는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참, 이 책의 영어 제목은 입에 좀 더 착 붙는다.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달리뷰가 리뷰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표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문학사상 출판, 2009.1.5 초판발행,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사진출처: 달리뷰)

 

달리면서 결국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은 총 아홉 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하루키는 1장에서부터 대뜸 말한다. 달릴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지만, 그런 질문은 오래 달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자기도 그 질문을 받고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제대로 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36쪽)'고 말한다. 

 

아니, 아무 생각도 안 한다면서 거기에 대해 267쪽 분량의 책을 썼다니?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사실 제목만 유심히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하루키는 자신이 달릴 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달리기에 대해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책에 담았다.

 

말장난 같지만 큰 차이가 있다. 달리는 건 몸이고 생각하는 건 정신(머리, 마음이라 해도 좋다)이다. 한 사람에게 몸과 정신이란 마치 '형식과 내용' 혹은 '동전의 양면'처럼 다르지만 뗄 수 없는 것일 터. 달릴 때는 몸에 더 몰입하고, 그때 그 몸과 함께였던 정신은 나중에 '말을 할 때' 활약한다. 

 

어쨌거나 하루키에게 달리기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45쪽)'이니까. 

 

달리기와 궁합이 맞는 이유: 고독 좋아, 강요 싫어, 살이 잘 쪄...(?!)

하루키는 자신이 타인을 상대로 이기고 지는 일보다는 혼자서 자신이 세운 기준을 달성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옆에 아무도 없이 몇 시간이고 말 한 마디 안 하더라도 그것이 딱히 괴롭지 않다고. 그리고 학창시절, 시켜서 하는 공부에 흥미를 느낀 적이 없고 오히려 사회인이 된 후 자신만의 선택과 패턴으로 뭔가를 하게 되며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운동 중에서 달리기와 잘 맞는다. 

 

하나 또 재밌던 건, 하루키의 아내는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인 반면 자기는 금세 살이 잘 붙는 체질이라, 이걸 '행운'이라고 생각했단 거다. 달리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동력이 됐다는 거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한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령 불공평한 장소에 있어도
그곳에 있는 종류의 '공정함'을 희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공정함'에 굳이 희구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어떤가를 결정하는 것
물론 개인의 재량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72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지만, 장기적으로 다층적으로 볼 때,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이 무언가를 해갈 여지가 있는 경우에, 무엇이 공평한 것인지는 한 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있지만, 결국 하루키는 세상의 불공평함 속에서 자신만의 공정함을 희구해냈다.

 

인생의 진리란 단순하고 보편적이나 소화하기 어려운 것 

하루키 생각으로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재능, 집중력, 지속력이다. 재능이야 훈련의 영역이 아니지만 집중력과 지속력은 훈련으로 길러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집중력과 지속력을 발달시키는 것은 매일 달리기를 하며 근육을 발달시키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126

 

그러나 재능, 집중력, 지속력이 필요한 것이 어디 소설가 뿐이랴. 그리고 꾸준히 자극하고 인내함으로써 발달시킬 수 있는 것이 집중력과 지속력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필요한 자질이고, 무엇을 발달시키려 하든 필요한 과정이다. 다만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지극히 단순한 진리가 삶에서 소화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이 진리의 묘미다. 

 

100km 울트라 마라톤 생생 간접 체험 

이 책 중후반부에 하루키로서도 생애 딱 한 번 뛰어본 100km 울트라 마라톤 에피소드(완주 11시간 42분)가 나온다. 마라톤 이후 잊기 전에 적어둔 글을 그대로 옮겼다는데, 163쪽부터 180쪽까지 약 18쪽 분량이다(사진이 꽤 있지만). 그리고 이 에피소드, 작가답게 아주 생생하게 써놔서 읽는 맛이 있다. 

 

풀마라톤 코스인 42.195km 지점을 넘어서며 '그 앞에 도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어떤 미지의 생물이 거기에 살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먼 옛날의 선원이 느꼈을 법한 두려움에 숙연해지는 마음이 어렴풋이 몸 안에 느껴진다(p.165)'라거나,

 

'뉴발란스의 울트라 마라톤 전용 슈즈(믿어주셨으면 좋겠다, 그런 것이 이 세계에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다)를 사이즈 8에서 8.5의 것으로 바꿔 신는다(p.166)'거나

 

55km에서 75km의 지점을 지나면서 '느슨하게 돌아가는 육류 다지는 기계 속을 빠져 넘어가는 쇠고기와 같은 기분이었다(p.169)'라거나

 

75km 이후 뭔가가 슥 빠져나가며 '한때는 들끓고 있던 근육의 혁명의회도, 지금의 상태에 대해서 일일이 시비를 거는 것을 포기한 듯했다(p.173)'라는 표현들! 누가 작가 아니랄까봐 아주 생생하면서도 찰진 문장에 읽는 나조차도 100km를 달리는 기분이다. 

 

문학을 좋아하든 달리기를 좋아하든 인생을 고민하든, 이 책 추천! 

이십대부터 하루키를 즐겨 읽었지만, 삼십대 초반에 이 에세이를 읽고 하루키라는 인간('작가' 말고 '인간')을 좀 좋아하게 됐다. 사실 이 책 읽고 한동안 조깅을 하기도 했다. (물론 아주 귀여운 수준으로) 그리고 100km는 아니지만 10km 마라톤을 신청해서 달리기도 했다지. 

 

내 취미가 독서인 걸 아는 주변 지인들이 가끔 책 추천을 부탁하는데, 상대가 책을 원래 많이 읽는 편인지 아닌지, 평소 관심사가 무엇인지, 성향은 어떤지를 알아야 적당한 책을 골라줄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누구에게든 부담 없이 추천하기 좋다. 문학이나 달리기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잘 읽히고, 재미도 있고, 생각할 거리도 던져준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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