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2013년) 작가이자 나의 최애 작가, 앨리스 먼로
앨리스 먼로는 1931년에 태어난 캐나다 작가다. 단편소설만 썼는데, 10년 전 노벨문학상을 탔다. 사실 단편소설보다는 장편소설을 더 좋아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앨리스 먼로의 단편은 다르다. 짧은 이야기임에도 엄청 묵직한 한 방 한 방이 있달까.
책에 실린 작가 소개를 보니, 2009년 <맨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는데, 이때 심사위원회의 선정 경위가 이렇다.
작가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하는 작품의 깊이와 지혜, 정밀성을 모든 작품마다 성취해 냈다.
이번에 읽은 건, 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실린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다. 영어 원제는 입에 좀 더 착 붙는 「Boys and Girls」. 이 소설집은 1968년에 출판됐고, 이 소설은 아마 1964년쯤 써진 듯하다. 벌써 거의 80년 전 작품인 셈. 솔직한 우려를 표하자면, 가벼이 읽었을 때 오해받을 여지도 있는 단편이다. 그러나 제대로 읽는다면 이 작품이 독자를 데려가는 곳은 정말 깊이 있는 성찰의 자리다. 앨리스 먼로의 능력이지.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어떤 울컥함이 있는 줄거리
소설은 어린 여자아이가 화자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캐나다 시골에 살며, 아버지는 여우 목장을 한다. 엄마와 남동생 레어드까지 총 네 식구다. 화자는 엄마를 따라 집안일을 돕는 것보다 아빠를 따라 목장일 하는 걸 더 좋아한다. 일을 하며 시시콜콜 많은 이야기를 하는 엄마보다 과묵한 아빠에게서 더 인정받고 싶어 한다. 계집애라고 자기를 구속하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소심한 반항을 하기도 한다.
아래 발췌한 부분에서 이런 화자의 생각과 행동을 단적으로 나타난다.
예전에는 계집애라는 말이 아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이 천진난만하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 같았다.
계집애는, 내가 지금껏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냥 본디부터 타고난 내가 아니라 어떠어떠하게 되어야 마땅한 존재였다.
계집아이를 규정하는 말은 언제나 강다짐과 꾸지람과 실망의 뜻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중략)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몇 주일 묵을 때면 으레 듣는 말들은 또 어떻고.
"계집애가 그렇게 문을 꽝꽝 닫으면 못쓰느니라."
"계집애는 다리를 모으고 앉아야 하느니라."
그보다 심한 말을 들은 건 내가 질문을 했을 때였다.
"계집애가 그건 알아서 어디다 쓰게."
그래도 나는 계속 문을 꽝꽝 소리나게 닫았고 되도록 다리를 쫙 벌리고 볼썽사납게 앉았다.
그것이 내 자유를 스스로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 p.220~221
그런데 11살 겨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화자 아빠는 마구간에서 말을 두 마리 키우고 있었다. 맥과 플로라. 오래 기른 만큼 늙어버린 말 두 마리는 총으로 쏘아 죽인 후, 여우 먹이가 될 예정이다. 그리고 화자와 남동생은 몰래 숨어서 아빠가 총으로 맥을 쏘아 죽이는 장면을 지켜본다. 맥은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다 쓰러져 허공에 발길질은 해댄다. 풀밭을 흥건한 피로 적시고 죽어간다.
2주 후 플로라의 차례가 왔다. 화자는 이렇게 회상한다. '동물을 죽이는 일이 우리가 살자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거라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조금 부끄러웠고, 새삼 경각심이 생겼다.(p.228)'
이 지점이 내게는 매우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이건 화자가 여자애라서 잔인한 장면을 보고 질색하는 게 아니라, 당위성을 알고 있고 자연스레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어떤 양심의 소리를 감각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플로라는 죽음을 예감했는지 열린 마구간 문을 뛰쳐나와 도망친다. 아빠와 헨리 아저씨가 플로라를 쫓아 달린다. 화자는 이 상황을 파악했고, 울타리 대문을 닫아 플로라를 가둘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아빠는 "가서 문 닫아!"라고 소리친다. 우리의 화자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문을 닫는 대신 되도록 활짝 열어젖혔다. 그럴 작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냥 그렇게 했을 뿐이다. 플로라는 속력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나를 스쳐 곧장 내달렸다.(p.230)'
그러나 결국 플로라는 붙잡혔고, 죽었다. 총과 칼, 트럭이 동원됐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플로라를 편들어 줌으로써, 가뜩이나 고생하는 아빠를 더 고생시켰을뿐더러 결국 플로라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 누구에게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말이 살기 위해 뛰어 도망치고 있을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었다고 회상한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화자가 문을 닫기는커녕 오히려 열어주었다는 게, 남동생의 고자질로 밝혀진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아버지는 체념한 듯 심지어 유쾌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나를 용서하되 영원히 내치겠다는 듯한, 그 말을 했다.
"계집애일 뿐이니까."
나는 그 말에 반발하지 못했다, 마음속에서조차.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모르니까.
- p.234
남녀 차별에 대한 체념과 수용?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마지막 내용만 본다면, 화자가 '난 어쩔 수 없는 계집애인가 봐'라고 체념한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앨리스 먼로는 이 소설에서, '어떤 중요한 감각'이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발달되어 있음을 설파한다고 본다. 그 감각이란, 현실성 없는 싸구려 감정도 아니고 곱고 예쁜 것에만 끌리는 무용한 심미성도 아니다.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노력을 해보자면,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면서도, 당장은 현실에서 어떤 차이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본질적 가치가 어떻게 취급받고 있는가를 꿰뚫어 보는 감각'이다.
화자는 오래 키운 두 마리 말, 맥과 플로라가 죽어야 한다는 걸 안다. 늙기도 했을뿐더러, 원래 여우의 먹이로 계획하고 말들을 사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캐나다라도 1960년대인데, 동물권리 같은 게 회자됐을 리도 만무하다. 하지만 화자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생명의 가치'를 저절로 감각했다. 그래서 도망가는 플로라에게 문을 열어 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변한 건 없고 오히려 일만 번거로워졌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아빠나 헨리 아저씨는 물론이고 화자보다 어린 남동생 레이드조차도, 말을 죽이는 데에 가차 없었다. 현실 논리에 의해 말을 죽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 일을 하는 데에 다른 생각은 필요하지 않았다. 잘못한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화자 같은 이가 아무도 없고 다 아빠, 헨리 아저씨, 레이드 같은 세상이었다면 어땠을까? 제국주의, 노예제도 같은 게 이어지지 않았을까? 지금이야 제국주의나 노예제도가 당연한 철폐의 대상이지만 그것이 횡행하던 시대에는 현실 논리에 의해 당연한 것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내 말에 약간의 비약은 있다. 노예제 폐지의 공이 여자들에게만 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본질적 가치가 짓밟히는 게 지당하던 시대에서조차도 그것이 부당하다고 감각할 힘이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더 강할 수 있다는 게, 이 단편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보여주는 바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 뭐 이런 얘기는 또 절대 아니다. 어떤 다름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조화롭게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이 단편은 여기까지 나가지는 않지만, 다른 또 멋진 책에서 이런 것도 읽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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