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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자전적 소설 두 권,『애니 존』& 『루시』

by 달리뷰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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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노벨문학상 후보,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누구?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1949년 앤티가섬의 수도 세인트존에서 태어났다. 앤티가섬은 남미와 북미 사이의 바다, 좀 더 정확히는 멕시코에서 동쪽으로 한참 가고 베네수엘라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있는 지역이다. 지금은 미국인이고, 하버드대 연구 교수라고 한다. 밀크 초콜릿 색의 피부를 가진, 책에 그린 주인공들처럼 고집 있고 강단 있어 보이는 얼굴을 한 여성 작가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자주 언급되기도 하더군. 
 
올해 한국 나이로는 일흔 다섯쯤 됐으니 꽤 원로 작가인데,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번(루시)과 213번(애니 존)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게 각각 2021년과 2022년 초판 발행이다. 작년 11월에는 민음사에서 이 작가의 다른 소설을 냈더군. 아직 이건 못 읽어봤고, 문학동네에서 나온 『애니 존』과 『루시』를 읽었다. 
 
두 권 다 130여 페이지의 얇은 장편소설인데, 잘 읽히면서도 당돌하고 날카로운 면이 있다. 특히  『루시』가 그렇다. 자전적 소설이라서, 두 권은 연작처럼 읽히기도 한다. 『애니 존』은 10살에서 17살까지, 『루시』는 20살 무렵 작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 한다. 아직 두 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저메이카 킨케이드가 올해나 내년이나 암튼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노벨문학상을 탄대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거 같다. 오랜만에 흥미로운 작가를 발견한 기쁨이 크다. 

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으로-발행된-저메이카-킨케이드의-장편소설-루시와-애니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중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장편소설 '애니 존'과 '루시'

 

애니 존, 어린 여자애의 시점이 일면 유치하면서도 인상적인 책

애니 존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다. 앤티카 섬에 사는 10살짜리 소녀 애니가 주로 엄마와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일상을 보내며 겪는 일과 생각들을 서술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절반 정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책에 재미를 못 붙였다. 어린애의 시점이 유치하기도 하고, 이게 장편소설임에도 왠지 큰 맥락 없이 단편소설들의 연결처럼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로 갈 수록, 어쩌면 화자가 10살에서 17살까지 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좀 더 인상적인 관찰과 마음들이 엿보였다. 엄마와 딸이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그런 미묘한 관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듯하다. 
 
그리고 책 뒤를 보니, 이 소설은 저메이카 킨케이드가 오래 일을 했던 뉴요커지에 부분부분 발표했던 글을 모은 것이라 한다. 단편집처럼 느껵진 것이 이상할 게 아니었다. 
 
책의 마지막에서 애니는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난다. 저메이카 킨케이드도 소설 속 애니처럼 똑똑하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열일곱살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뉴욕으로 간다. 뉴욕으로 간 애니, 혹은 저메이카 킨케이드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면 이제  『루시』를 펼치면 된다. 
 

루시, 뉴욕 부잣집에서 입주 보모로 일하는 스무살 여자의 삶

루시 역시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주인공 이름은 루시다. 루시 대신 애니라고 했다면, 애니 존의 2편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다. 이 책은 처음부터 마음에 꽤 들었다. 스무살 여자애의 반항심과 통찰력이 퍽 날카롭고도 풍자적인데, 그러면서도 어떤 지긋지긋한 정 같은 게 있달까.
 
루시는 앤티카 섬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와서 머라이어와 루이스 부부의 집에 입주 보모로 들어간다. 이 집에는 루시가 돌볼 아이들이 넷이나 있다. 운이 좋게도 주인인 머라이어는 상냥하고 착한 여자다. 루시를 아끼고, 루시에게 많은 걸 보여주고 싶어 한다. 루시도 머라이어를 좋아하지만, 그녀에게서 어떤 한심함을 느끼기도 한다. 한참 어린 여자애가 친절한 자기 고용인에게 한심함을 느끼는 게 철없거나 무례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렇지 않다. 루시가 제대로 꿰뚫어 본 본질이 있기 때문에 그렇고,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실제 삶에서도 그렇고, 이 소설 속 루시도 그렇고, 고향에서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는 엄마와 인연을 끊는다. 그리고 엄청난 행운이라 해석할 수도 있는 상냥한 여주인의 입주 보모일도 그만둔다. 루시는 안락하고 평범하고 덜 위험한 무언가로부터 본능적으로 달아나는 것 같다. 스무살 청년 안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반항심, 책을 읽다 보면 일면 이해가 된다. 
 
이 책은 문장도 꽤 매력적이다. 수려하고 멋지다기보다, 자기만의 시선으로 당돌하게 직시하는 세상이 글로 잘 담겨 있다. 이를 테면, 이런 문장들이다. 

다이나를 보면 떠오르는 그런 부류의 여자가 싫었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고 스스로도 그 점을 아주 대단하게 여겼다. 세상살이와 관련해 내가 지닌 믿음 중 하나는, 아름다움이 여자들에게 대단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니까.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고 뭘 어떻게 해본들 되찾을 수 없을 테니까. 

-  『루시』 p.48
머라이어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다루는 그림책을 쓰고, 그것을 지키려 애쓰는 단체에 수익금을 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머라이어와 마찬가지로 그 단체 회원들은 모두 부유했지만, 눈앞에서 진행되는 세상의 피폐화와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중략) 구하고 싶은 것들을 다 구하고 나면 그녀 자신의 처지는 예전만 못하게 될 거라고 꼬집어 말해줄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루이스가 매일 주식거래인과 나누는 대화를 잘 따져봐라, 그것이 당신의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들과 관계가 있지 않겠냐, 그런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내가 즐겨할 법한 말이었는데, 내가 그렇게나 머라이어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  『루시』 p.60

 
애니 존과 루시는,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어린 시절이자 세상에 말하고 싶은 어떤 존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칭얼대거나 투정하기보다는 시니컬하게 떠나고 어쩌면 조금 무모하게 살아가는 아이에게서, 지금 세대가 성찰해야 할 어떤 모습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금방 읽히지만, 오래 마음이 머물게 되는 책이다. 민음사에서 나온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내 어머니의 자서전』도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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