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명작 영화로 잘 알려진 <하나 그리고 둘>
이 영화는 대만 감독인 에드워드양이 2000년 발표한 작품이며, 당해에 깐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나무위키에 나온 서정환 평론가의 평을 빌리면,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을 통해 대변되는 개인의 삶의 순환이 가족, 사회의 구성으로 연계되는 너르고 깊은 통찰이 돋보이는 걸작' 영화다.
하나의 굵직한 사건이 아닌 여러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데다가 세 시간에 가까운 긴 러닝타임(정확히는 173분) 덕에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다.
넷플릭스에도 왓챠에도 없길래 구글 플레이에서 찾아두고, 처음에 보다가 집중 못해 꺼버리고, 다시 도전하여 자체적으로 한 번 인터미션을 갖고 다 봤다. 아주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할 거리를 꽤 던져주는 좋은 영화라고는 생각한다.
달의 뒷면: 볼 수 없지만, 보는 것을 포기해선 안 되는 반쪽의 진실
자신의 뒷모습, 혹은 달의 뒷면. 분명 존재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는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뒷모습에 집중한다. 영화 시작 1시간 쯤 되는 시점에, 8살 양양(위 포스터의 아이)이 아빠와 이런 대화를 한다.
아빠, 아빠가 보는 걸 난 못 보고, 난 보는데 아빠는 못 봐요.
둘 다 보려면 어떡해야 하죠?
그건생각 못해봤는데... 그래서 카메라가 필요한 거란다.
카메라로 찍어보렴.
우린 반쪽짜리 진실만 볼 수 있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니까 반쪽짜리 진실만 보이는 거죠.
- <하나 그리고 둘> 대사 中 -
이후 양양은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기 시작한다. 영화 후반부에 양양은 삼촌 아디에게 아디의 뒤통수를 찍은 사진을 건네주고, 삼촌이 이런 사진을 왜 찍었는지 물으니 "삼촌은 뒤를 못 보니까 내가 찍었어요."라고 말한다. 영화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여러 일들도 일어나지만, 가장 어린 양양이 아이다운 순수함과 예술가다운 어떤 우직함으로 카메라를 들고 이 영화의 핵심을 짚어주는 듯하다.
줄거리라 하기엔 산만하지만, 다 보고 나면 수렴하는 이야기들
영화는 시끌벅적한 결혼식으로 시작해 차분한 장례식으로 끝난다. 양양의 삼촌 아디와 샤오얀의 결혼식, 그리고 양양의 할머니의 장례식. 결혼식 이후 할머니가 쓰러져 의식을 잃은 상태로 집에 누워 있는데, 가족들이 할머니에게 와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가족 각각의 뒷모습들이 여러 관계와 사건을 통해 보여진다.
1. 아빠 NJ와 그의 첫사랑 셰리, 그의 아내 민민
양양의 아빠 NJ는 결혼식에서 첫사랑이었던 셰리를 만난다. 어딘가 미련이 남은 듯한 재회. 오래 전, 셰리는 NJ가 자신에게 오길 오래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둘은 영화 후반부에 NJ가 출장을 간 일본에서 다시 만나 청춘을 회상하며 데이트를 한다. 즐거이 옛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고,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다니고, 그때 왜 오지 않았느냐고 소리치기도 하고, 상대는 모르지만 난 상처였던 추억을 꺼내 원망하기도 한다. 선을 넘을 듯 넘지 않는 둘의 관계. 이번에는 셰리가 말이 없이 떠나고, NJ도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인다.
양양의 엄마 민민은 혼수상태인 본인 엄마에게 할 말이 매일 똑같은 일상뿐이라며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자기자신에 대해 울음을 터뜨린다. 남편인 NJ는 간호사에게 장모를 돌보게 하자며, 아내가 잠시 집을 떠나 쉴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아내는 절에 들어가고, 장례식 전까지는 더 이상 영화에 나타나지 않는다. (NJ와 셰리 이야기는 민민이 간 이후에 펼쳐짐)
부부는 각자의 방황을 마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2. 누나 팅팅과 그녀의 친구 리리, 그리고 패티
팅팅은 양양보다 열 살 쯤 많은 여고생이다. 삼촌 결혼식 이후 할머니가 쓰러진 채 발견된 것이 자신의 탓인 거 같은 죄책감을 안고 있다(자기가 버려야 했던 쓰레기를 버리러 가다가 할머니가 쓰러짐).
팅팅의 옆집에는 리리네가 이사오는데, 팅팅과 리리는 친구가 된다. 그리고 리리의 남자친구 패티도 팅팅과 아는 사이가 된다. 중간에 리리와 패티는 헤어지고, 패티가 팅팅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다가 둘이 가까워지면서 데이트를 한다. 그러나 끝까지 잘 되진 못하고, 패티는 결국 다시 리리와 만난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 패티가 리리의 영어 선생님이자 리리 및 리리 엄마와 각각 섹스를 한 남자를 살해한다. 큰 사건이지만,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약간 이물감 혹은 과하다는 느낌이 드는 파트이기도)
3. 여덟 살 양양의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
위에 짧게나마 기록했듯, 여러 커플들이 다소 복잡하게 얽혀 있다. 굳이 길게 쓰진 않겠지만 삼촌 아디도 옛 연인 윤윤과 현재 아내 샤오얀 사이에서 곤혹을 겪기도 한다. 주로 남녀 관계, 그외에도 친구 관계, 가족 관계에서 사람들은 안다고 생각하지만 다 알지는 못하는 마음과 상황들로, 오해를 하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의 양양, 어른들처럼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으나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어도 양양은 학교에서 여자애들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하고, 학교 선생님에게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제법 꿋꿋하다. 그리고 (아마도 좋아하게 된) 한 여자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그 아이의 경험을 자신도 가져보려 한다. 수영을 하는 여자아이를 보고, 집에서 세면대에 얼굴을 넣어 잠수를 연습하고, 비가 오는 어느 날 일상복을 입은 채로 수영장에 들어간다. 그리고 흠뻑 젖었지만 흡족한 미소를 띠고 집에 들어온다. (아래 사진 좌측)
개인적으로 영화의 하이라이트,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쓴 양양의 편지
후반부에 들어서면, 영화 속 인물의 대사를 통해서도 그렇고 보는 이의 마음 속에서도 그렇고, 이런 생각이 든다.
'절반의 진실이 아닌 온전한 진실을 알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거야'라는 생각은 아마도 아닐 거라는 것. 그러했든 그렇지 않았든 별로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것. 막상은 참 복잡하게 보이지만 사실 사는 건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
물론 이건, 다 알 수 없을지라도 알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이 영화 속 인물들도, 이 영화를 만든 감독도, 결국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할머니, 죄송해요.
할머니와 말하기 싫었던 게 아니에요.
무스 말을 할까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할머니가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았어요.
할머니는 항상 남들 말에 귀 기울이라고 하셨잖아요.
사람들은 할머니가 멀리 가셨다고 해요.
그런데 저한테는 간다고 안 하셨잖아요.
그래서 제 생각엔 제가 스스로 알아내야 할 것 같은데,
할머니, 저는 아직 어리잖아요.
제가 나중에 커서 뭘 하고 싶은지 아세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그들이 모르는 걸 알려주고 볼 수 없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언젠가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가신 곳을 알아낼지도 몰라요.
그럼 그곳이 어딘지 사람들한테 말하고 다 같이 할머니를 보러 가도 돼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
특히 올해 태어나 아직 이름도 없는 어린 사촌을 볼 때 더욱 그래요.
그 아기를 보면, 할머니가 "이젠 늙었나 보다" 하시던 게 생각나요.
저도 사촌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나도 다 컸나 보다."
- <하나 그리고 둘> 대사 中 -
인상적인 플롯: 시공간을 너머 반복되는 아빠의 데이트와 딸의 데이트 장면
내용이나 메시지와는 별개로 (사실은 다 엮여 있지만서도) 이 영화에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건, NJ와 셰리가 일본에서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는 장면과 팅팅과 패티가 대만에서 첫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교차되어 나타나는 부분이다. NJ와 셰리가 거의 이십여 년 전 했던 첫 데이트의 모습은 팅팅과 패티의 데이트에서도 상당 부분 유사하게 재현된다. 이미지와 대사의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
역시 명작이라 불리려면,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과 그걸 하나로 묶어내는 묵직한 맥락, 그리고 감탄을 자아내는 플롯까지 다 갖춰져야 하는 듯.
다시 보면 더 많은 걸 캐치하며 더 감명 깊게 볼 거 같기도 한데, 세 시간이나 되는 러닝 타임은 재시청을 다소 망설이게 한다. 그래도 다시 보면 더 좋을 거 같은 목록에 저장!
'영화 및 TV'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글로리> 빌런들, 인과응보의 끝: 죽음 혹은 망함 (0) | 2023.03.13 |
---|---|
<더글로리> 파트2, 살벌한 복수 속 달콤한 꿀 한 스푼💕 (0) | 2023.03.12 |
꽤 쫄깃한 사이다 스릴러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0) | 2023.03.09 |
<더 글로리> 파트2, 나만의 핵심 관전 포인트 셋! (feat. 넷플 공식 떡밥 정리) (0) | 2023.03.06 |
짧고 굵고 진한 교감, <나의 문어 선생님> (0) | 2023.03.04 |
댓글